2012년 10월 18일 목요일

정규직 노동의 경직성 해소 방향

귀국한 후 직장에 다니면서 느낀 한국의 특이 현상 중 하나가 사오정이었다. 왜 회사가 기껏 기른 중간 간부 인력을 다른 나라 같으면 한참 일할 나이인 40대 중반에 조기 퇴직을 시키는 것일까? 이 의문은 회사를 몇 달 다녀보니 금방 풀렸다. 한국 기업의 보수체계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경험을 들어 설명해보자.



오랫 동안 외국에 살다가 귀국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귀국할 때 가장 걱정을 많이 했던 것은 아이들 교육과 주택 문제였다. 이 중 집 문제는 회사가 해외입사 직원에게 빌려주는 대출금과 부모님 도움으로 전세집을 마련하는 것으로 숨을 돌렸다. 

그러나 아내는 못내 불안해했다. 빌린 돈은 결국 갚아야 하는데 당시 내가 받는 월급으로 어떻게 그 돈을 갚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자신이 직장을 얻어도 아이들 교육비를 생각하면 도저히 빚을 갚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못미더워하는 아내를 달래기 위해 엑셀로 현금흐름표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내가 가정한 연간 소득 증가율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어떻게 그렇게 당신 월급이 빠르게 올라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지난 십년간 한국 대기업 직장의 연봉이 얼마나 빠르게 상승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승진에 따라 얼마나 오르게 되어 있는 지를 설명했다. 한마디로 아내는 한국 직장의 연공서열에 기초한 보상제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몇년 전 어느 금융회사에 컨설팅을 하면서 그 회사의 콜센터를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사실 나는 경영진으로 일하던 기간 중에도 콜센터에 관심이 많았다. 국내 금융회사들이 콜센터의 잠재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고도 생각했기도 했지만, 콜센터 직원들이 대부분 비정규직이어서 부당하게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보수와 근무환경을 개선하는데 신경을 썼었다.

그런데 이 회사의 콜센터 직원들은 다른 회사와 달리 정규직이었다. 그러나 근무 환경은 내가 본 중에서 가장 나빴다. 환기도 잘 안되는 어둑어둑한 반지하 공간에 모여 있었다. 노동 강도도 다른 회사보다 더 강했다. 정규직이라지만 낮은 직급이어서 보수도 낮아서 다른 회사보다 높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직률이 매우 낮았다. 일들도 정말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이 의문은 직원들과 대화를 하면서 풀렸다. 이들은 일정 기간 이상 일하면 직급이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직급이 올라가면 대졸 신입사원 직급이 되고, 그러면 연봉이 40%가 오르게 되어 있었다! 직원들이 나쁜 환경과 강한 노동강도를 참고 있을만도 했다. 이렇게 한국의 대기업에서는 직급이 오르면 연봉이 천만원 단위로 오른다.  그런데 이것은 경영자 입장에서는 큰 문제다. 시간이 지나면 임금이 급격히 상승한다.

이와 같이 한국 기업의 보상제도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연공서열 기준 보상제도다. 그리고 연공이나 직급이 올라가면서 보수가 가파르게 상승한다. 초임 대비 부장의 연봉이 3배를 넘는다. 임원이 되면 더욱 높아진다. 내가 알기로는 일본보다 그 가파른 정도가 더 심하다.

또 다른 특징은 직무급제가 발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하는 일이 달라도 직급이 같으면 연봉이 비슷하다. 이 문제를 일부 해결하기 위해 보너스 제도가 확산되고 있지만 은행이나 공기업의 경우는 그 보너스의 폭이 매우 좁다. 노조가 강한 곳일 수록 전체 연봉에서 보너스의 비중을 높이는 것에 대한 저항이 강하다.   

한국 대기업 직장에서 실제적인 정년이 짧거나 사오정이라는 중간퇴직을 실시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이가 든다고 직원의 생산성이 3~4배 증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이가 들면서 생산성과 보상 간에 격차가 점점 벌어지게 된다. 생산성과 상관 없이 연령이나 근속연수가 늘어나면 보수가 늘어나고, 하는 일이 다른데도 직급이 같으면 같은 보수를 받기 때문이다. 사실 이 문제는 노동시장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기업에서 인사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즉이 큰 숙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지 노동시장의 문제로만 인식할 뿐 그것이 사회전체적인 보상체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연공서열에 의한 한국의 보상체계는 자녀 교육, 부모 부양, 은퇴 준비의 부담을 국가보다 개인이 짊어지는 한국의 복지 체제와 맞물려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저부담 저복지 체제다. 그런데 중년기에는 부모 부양과 자식 교육의 부담이 급격히 증가한다. 연공에 의한 보상체계는 이러한 경제적 압력을 감안하여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중년층 근로자의 생산성과 보상 간 격차를 크게 하는 구조적 취약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고용주는 고령자를 중간에 퇴직시키고 싶은 유혹을 갖게 되어 있다. 외환위기 전까지 이를 보완하는 것이 암묵적 사회계약에 의한 종신고용이었다. 이마저 한국에서는 일본과 달리 공기업과 대기업에서만 실시했지만,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에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러면서 등장한 것이 사오정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불안감이 급증한 것은 사회보장체제의 개편을 하지 않은 채 종신고용제도만 무너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직무급제 미발달 문제가 겹치면서 재직 연수에 따라 생산성과 보수간 격차가 벌어지는 문제가 심화되었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직무급제 도입에 대한 저항이 크다. 하긴 처음 들어올 때 동급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담당 직무에 따라 보수가 달라지는 것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인간은 자기가 동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비교해서 자기의 처지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또, 저부담, 저복지 체제가 노동시장 경직성을 더 악화시키도 한다. 

그러면 이제라도 연공급에서 능력급과 동일노동 동일임금으로 바꾸면 되지 않을까?

이는 노동시장에 엄청난 혼란을 준다.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에서의 가격은 당장 생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같이 매일 보고 사는 동료들 간에 사회적 갈등을 만든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용주나 직원들 모두 연공서열 보상체제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어정쩡하게 지금까지 오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오정 현상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해진다. 우선 이 문제에 대해 정부가 노동시장에서 직접적으로 취할 수 있는 정책의 폭은 넓지 않다. 연공 기준 보수체계와 직무급제도 미발달은 인위적으로 정부가 개입해서 개선하기가 어렵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불공평한 임금 격차도 해소하기가 쉽지 않다. 인사이더로서 자리를 차지한 정규직 고용자들의 보수는 누가 보기에도 불공평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강제적으로 개입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야당에서 주장하듯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자는 식의 방안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해결책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저부담, 저복지 체제를 고부담, 고복지 방향으로 점차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엄격한 지금의 해고 규제를 완화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러한 복지체제 개편 속도와 연계해서 추진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우선 추진할 수 있는 정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업보험제도 개선이 그것이다. 경제 침체가 지속되면서 조만간 실업자가 늘게 되어 있다. 언제까지 좀비기업과 부실기업을 놔둘 수만도 없다. 비정규직 뿐만이 아니라 정규직에서도 실업이 늘게 되어 있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현재 실업보험은 대상자가 많지 않고, 자격 요건이 엄격하고, 혜택이 낮으며, 연공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 실직전 18개월(기준기간) 동안에 고용보험이 적용되는 사업장에서 근무한 기간(피보험단위기간)이 180일 이상인 사람에게 90일에서 240일간 지급한다. 보험금은 이직전 직장에서 지급받던 평균임금의 50%를 지급하고 일 상한은 4만원에 불과하다. 그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넉달 이상 받기 어렵다.

무엇이 문제인가? 가장 큰 문제는 사각지대가 많다는 것이다. 근로자 중 약 30% 정도만 혜택을 받고 있다. 또, 현재의 실업보험은 가정과 자녀를 둔 4~50대 직장인에게 별 도움이 안된다. 또, 대기업 장기 근무 출신자에게 유리하고 실업자의 가족 상황과 관계 없이 지급하고 있는 문제도 있다.

사각지대를 좁히는 것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우선 실업급여 액수를 평균임금의 70%까지 인상하고 일 상한도 5만원으로 인상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의 어떨까? 피보험기간 연령에 따라 차등급여를 하는 대신 일괄해서 150일 간 지급하고, 대신 18세 이하 자녀가 있는 경우 150일을 추가 연장하는 방법을 고려할 만하다. 당연히 돈이 들어간다. 필요 재원은 단기적으로는 국고에서 지원하고 향후 고용보험료 조정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지난 글에서 귀족노조의 그림자가 길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개선하는 수 밖에. 그리고 그것은 실업보험제도 개선부터 시작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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