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9일 화요일

경제민주화 논쟁의 의미: 한국 사회 최초의 경제체제 논쟁

기독 민주주의

신임 교황 프란치스코 1세가 오늘 즉위한다. 벌써부터 파격적으로 소탈한 그의 행보와 가난한 자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강론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와 청빈한 삶의 상징인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천주교 역사 상 처음으로 자기의 연호로 선택했다. 그 이름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교황으로 선출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옆에 있던 브라질 추기경이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사실 카톨릭 교회가 가난한 자에 대해 갖는 관심은 단순히 감상적 측은지심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산업혁명 후 19세기에 자본주의가 급격히 발달하면서 카톨릭 교회는 빈곤의 문제와 이를 낳는 자본주의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여러 교황들이 여러 차례 회칙(Encyclical)을 통해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경고해왔다. 첫 회칙은 1891년 레오 13세가 발표한 것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배격하는 내용이었다. 그 후 20세기에 들어서도 빈곤에 대한 사회 비판 및 교회의 의무를 강조하는 회칙은 계속되었다.

유럽의 현대 정치 지형에서 우익을 기독교 민주주의(Christian Democracy) 정당이 차지하고 있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이 기독 민주주의 정당은 한국 사람들에게 낯선 개념이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들이 왜 기독교 민주당으로 불리는 지도 잘 모른다. 기독 민주주의는 보수주의와 빈곤문제에 관심을 갖는 카톨릭 사회교리의 영향을 받아 19세기에 유럽에서 발생했다. 유럽의 기독민주당은 보수세력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자의 폐해를 모두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고 한 움직임의 소산이다. 자본주의가 낳은 소득 불평등의 문제에 국가가 개입해서 시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사회주의를 배척하고, 시장 경제를 선호한다.

기독민주주의와 경제민주화

흥미로운 것은 이 기독 민주주의가 경제민주화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경제민주화의 출발점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본다.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적 부작용 제거를 위해서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에 근로자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노동조합의 주장이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에 반영되면서 작업장 민주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경제민주화가 이론적 틀을 갖춘 것은 1950년대 독일의 기독민주당이 사회적 시장경제를 주장하면서였다.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독일의 전후 경제부흥을 이끌어낸 것이 바로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중시하고, 독과점을 철저히 규제하고, 노동자의 기업 의사결정 참가를 권장하고,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는 독일 기민당의 경제정책이었다. 대공황 이후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계획경제와 케인즈주의가 득세하던 시절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다시 들고 나왔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유럽식 신자유주의는 경제력 집중과 독과점에 대해 엄격하고, 보편적 사회안전망 제공을 적극 수용한다는 면에서 1980년대 이후 영미권의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개념이다.

이러한 수정자본주의 경제체제 구축은 독일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대륙 국가에서도 이루어졌다. 유럽국가들은 1950년대 이후 열악한 근로조건, 독과점체제에 따른 경제력 집중, 빈부 격차의 심화 등 자본주의가 노출한 비민주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사회경제적 소외계층들의 꾸준한 요구를 반영하여 경제재건을 이룩했다.

현재의 유럽 경제 체제는 우파 정당과 좌파 정당 사이 국민들의 표를 얻기 위한 경쟁 과정을 통해 체제 노선의 수렴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독일 사민당은 2차대전 후에도 한동안 주요 생산시설의 국유화를 주장하다가 1957년 선거에서 대패하면서 비로소 국유화 정강을 포기했다. 프랑스 역시 사회당이 1982년 집권하면서 주요 산업 국유화를 실시했지만 그 후 사회당은 국유화를 포기했다.

이와 같이 경제민주화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등장한 전후 유럽의 수정 자본주의체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 체제 수립은 좌우 정당간 토론과 경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파시즘과 한국 경제체제

한국에서의 경제민주화 역시 근본적으로는 박정희 시대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시정하려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고속 성장기에는 덮어두었지만 성장속도가 느려지면 드러난 사회경제적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바로 경제민주화라는 말로 집약된 것이다. 기업 지배체제 개혁, 독과점 방지, 노동시장 개혁도 있지만, 복지체제 또는 조세체제를 통한 경제력 집중 방지 등이 우선 과제로 등장하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독일에서와 같은 기업 경영권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경제민주화 논쟁은 한국인들이 해방 후 최초로, 정치적인 압제의 굴레 밖에서 자유롭게, 정치과정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한 체제 논쟁이다.

해방 후 한반도 가운데에 냉전 대립의 경계선이 그어지면서 우리 민족은 우리가 원하는 국가체제를 자주적으로 결정을 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북한은 물론이고 남한 역시 타율적인 체제였다.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채택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남한을 지배한 것은 국가사회주의 또는 파시즘에 가까웠다. 파시즘과 같이 민주주의도 뒷전이었고, 시장경제도 불신했고, 단지 이윤을 남기는 방식만 자본주의였다. 어떤 식의 민주주의와 어떤 식의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독재정권 체제 아래에서는 금기시 될 수 밖에 없었다. 

1987년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도 경제는 여전히 정경유착과 고속성장의 틀에 갇혀 있었다. 기존의 정부 주도 아래 대기업 수출주도형 경제체제에 자율화 바람이 들어오면서 재벌의 과잉투자가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그 후에도 한국은 여전히 고속성장을 갈망했고 정경유착을 해결하지 못했다. 외환위기 덕분에 가까스로 정권을 잡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역시 이 체제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한국의 주류 사회는 소득 양극화를 성장률을 높이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을 거치면서 우파 정권 역시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소득 불평등의 문제를 더 이상 감출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 자각을 우파 정당이 하게 되면서 그들 역시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정치민주화 25년 후 시작한 경제체제 논쟁 

한국에서 경제민주화 논쟁이 본격화된 것이 바로 우파 정당의 자각과 돌파구 모색 후에서야 시작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양당이 공동으로 이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이를 위해 구체적인 정책 경쟁을 할 때 비로소 경제민주화 논쟁이 정치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경제민주화가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 무의미하다.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도 갖추지 않은 채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구호로만 기능을 해서는 아무런 진전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정경유착과 고속성장 신화에서 벗어나 소득 양극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둘러 싼 논의가 바로 경제민주화 논의다. 결국 이는 우리가 어떤 경제체제를 지향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사회의 경제체제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한 대화와 경쟁을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다. 1987년 민주화 혁명은 우리 사회의 정치 분야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대화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시작된 된 계기였다. 그 후 25년이 흘렀다. 처음에는 직접선거 민주주의에 주 관심이 가 있었지만,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 인권 존중,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자본주의, 어떤 경제체제를 원하는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역시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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