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조직이나 사회가 되었든 좋은 의미의 엘리트를 선발하고 그가 안정적으로 조직을 이끌도록 해야 성공할 수 있다. 이것은 아주 기초적이지만 매우 중요하다. 알다시피 영어로는 이것을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라고 한다. 흔히들 선발만 강조하는데 그가 일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 사회는 이 두 가지 모두 실패하고 있다. 신분 계층적인 벽이 다시 두꺼워지고 있으면서 그 벽 안에서는 내부자들끼리 서로 돌려 가며 해먹던 조선시대의 관습이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길하다.
최근 한국 언론에 조금 엉뚱한 기사가 뜬 적이 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 총장이 새로 선임되었는데 그가 흙수저 출신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명문이라도 어느 미국 대학 총장 선임이 기사화된 것이 왜 아시아 국가의 뉴스 거리가 되는가 의문스러웠다. 또 미국 대학 총장은 대부분 학문적으로 훌륭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행정적으로 리더쉽이 있거나 또는 모금 능력에서 뛰어난 사람이 맡는 직책이다. 여기서 그가 가난한 집안 출신인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한국의 유수 대학 총장 중에도 가난한 집안 출신이 많다.
그러나 정작 내가 눈여겨 본 것은 다른데 있었다. 그가 12대 총장이라는 것이다. 1891년에 설립되었으니 거의 120년이 넘은 학교인데 이번 총장이 겨우 12번째다. 사실 나는 몇년전 다른 학교의 역사를 읽다가 같은 이유로 놀란 적이 있다. 과거 7대 여자대학 명문 중 하나였던 바사 대학(Vassar College)은 현 총장이 11대다. 1861년 창립이니 150 년 동안 겨우 전임 총장이 겨우 10명에 불과하다. 한 사람당 15년씩 재직했다.
대학만 이런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현 GE 사장인 이멜트는 사장에 취임한지 거의 20년이 되었다. 40대 초반에 사장이 되었고, 지금은 60대 초반이다. 그의 전임인 웰치는 1981년에 사장으로 취임한 후 20년 후인 2001년 은퇴했다. 즉 이 회사는 지난 40년 동안 사장이 단 두명이었다. 비록 단기 성과주의가 극성을 떨어서 상장사 사장의 평균 임기가 3~4년으로 줄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10년이 넘게 사장으로 있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다.
이런 장기 복무는 사립 학교나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몇년 전에 본 미국 신문에 의하면 미 국방성에서 핵무기 전략을 담당하던 수석 전략가가 은퇴를 했을 때 그의 나이가 70대 였다. 그런데 내가 그 기사를 보고 정작 놀랐던 것은 그의 은퇴 나이가 아니라 그의 재직 기간이었다. 그는 그 보직을 맡은 것이 1970년대 후반이었다고 한다. 거의 40년은 한 자리에서 일했던 것이다.
조금 장소와 격을 바꾸어보자. 현 독일 수상인 메르켈이 취임한 것은 2005년이다. 현재 11년째 수상으로 일하고 있다. 그 전에 콜 수상은 1982-1998년 즉 16년을 재임했다. 그 전임인 슈미트 수장은 1974년에서 1982년까지 8년을 했다. 50년대에서 60년대에 있던 아데나워를 기억하는가? 그의 밑에서 재무상을 거의 15년을 하면서 독일의 사회경제체제를 구축한 에르하르트르 기억하는가?
서론이 너무 길어져 버렸으니 이 얘기는 그만하고 한국으로 돌아와보자.
공영방송의 침몰 원인을 지배구조 문제에서 찾는 컬럼을 보고 동감하기는 하지만 사실 이 문제는 공영방송 뿐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전분야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문제라고 했었다.
최근 일어난 방석호씨와 관련된 추문이 잘 보여주듯이 한국 사회에서는 각 분야에서 윤리적이고 전문성이 뛰어난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턱도 없이 부족한 사람들이 리더로 임명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사람들도 현 정권의 이런 무착스러운 인사에 대해서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사람들은 대통령이나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인사를 전횡하고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인사권의 독점이 꼭 형편 없는 인사로만 귀결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인사권자가 좋은 인물을 리더로 임명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경우도 많았다. 박정희와 박태준, 전두환과 김재익이 좋은 예다.
현 정부가 이런 사람들을 계속 리더로 선임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것은 인사권자의 무능을 나타내는 징표가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만약에 회사 사장이 뽑은 사람들이 한두번도 아니고 계속 실패한다면 이는 뽑힌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뽑은 사람의 잘못이다.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또는 그런 사장을 뽑은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조직의 리더가 하는 일의 반은 인사다. 그리고 비전과 전략을 세우는 일이 나머지 반이다. 실제로 일을 해보면 전략보다 인사가 훨씬 어렵다. 논리가 안 통한다. 상대가 사람이고 그 사람은 자기만의 자유의지와 결함을 갖고 있다. 그래서 결과를 미리 예측하거나 통제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어느 리더가 일을 잘하느냐는 사실 전략보다 인사를 잘하느냐에서 대부분 결정된다. 전략가가 꼭 좋은 리더가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신 인사를 잘하는 사람은 거의 항상 좋은 리더로 인정을 받는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인사를 계속 실패하는 것이 특정 인사권자가 아니라면? 그런 일이 일개 회사나 방송국이나 교회가 아니라 한 나라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인사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많은 분야에서 대를 이어서 계속 인사를 실패하고 있다면? 지금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좋은 리더를 선발하는데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수가 많다고 생각한다. 어느 분야나 좋은 사람 찾기가 힘들다고 한다. 실제로 각 분야에서 좋은 리더라고 손꼽히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내가 이 주장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다만 그동안 많은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의할 것이라고 믿는다.
한가지 생각 실험을 해보자. 만약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자. 즉 그들 주장에 의하면 한국 사회가 그런대로 좋은 리더를 계속적으로 선발해 왔고 그들이 도처에서 지금 일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왜 그런 좋은 리더가 3~4 년 만에 계속 바뀌는가? 그렇게 좋은 리더가 계속 바뀌는 것이 좋은가? 그런 조직이나 사회는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지금 한국이 그러하다. 엄청나게 많은 분야에서 리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3~4 년은 커녕 1~2 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그 후임자도 1~2 년 만에, 아니면 끽해야 3 년 만에 물러난다.
내 생각에 이런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 뿌리가 오래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조 500여년 동안 지금의 서울 시장에 해당하는 직책은 한성 판윤이었다. 그 500년 동안 한성판윤 직책을 맡았던 사람의 수는 약 1500명이다. 일년에 세명 꼴이다. 이게 특정 시기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5백년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이런 현상은 한성판윤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관직에 해당되는 얘기다. 정승판서가 수시로 갈렸다. 조선시대 인물들의 관직 경력을 보면 수개월 만에 다른 자리로 옮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일을 얼마나 잘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관직을 한번 했다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런 직함을 한 사람이 오래 독점하도록 두지 않았다. 세습 신분사회에서는 그런 관직을 한번 해보았다는 것이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번 하면 그 행세를 두고 두고 했다. 조부가 정 3품이었느니, 5대조 할아버지가 이조정랑이었다느니.
한 마디로 말하면 이러한 현상은 중앙집권적 국가에서 최고 권력자가 제한된 관직 자리를 양반들 사이에 나누어 주어야 하다 보니 생긴 현상이다.
이런 풍속과 기제는 현대 한국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장관이 일년을 못 가서 바뀐다. 사장이 3년이면 갈린다. 연임을 하는 것은 예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사장 아래로 내려와도 마찬가지다. 꽃보직은 순환근무로 나눠 먹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종신에 가까운 국회 원내 총무를 한국에서는 1년 동안만 한다. 국회의원 3선이면 험지에 출마하라고 한다. 모두들 '왜 너만 해먹느냐, 나도 좀 해보자'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나 40년 동안 광야를 헤맬 때 그들의 지도자는 모세와 여호수아 둘 뿐이었다. 5년 단임 임기제였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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