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7일 수요일

새로운 경제체제를 찾아서: 시대착오적인 보수과 맹목적인 진보 사이에서 새길 찾기


안철수 진영에서 며칠 전 경제민주화 정책을 발표했다. 재벌개혁과 공정경쟁에 모두 방점이 가있다. 민주통합당 안과 대동소이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출자총액제가 빠졌고, 재벌개혁 위원회와 계열분리 명령이 들어갔다. 경제민주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1년이 지났으므로 특별히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장하성이나 전성인처럼 참여한 사람들 자체가 민주당과 평시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전체적으로는 민주당 안보다 조금 더 정직하다. (민주당이 출자총액제를 고집하는 것은 순전히 정치적 관성과 허세에 의한 것이다.) 안철수가 맥빠진 정치비전을 발표하면서 같이 내놓은 엉성한 중소기업 정책보다는 완성도가 높다는 것 정도를 위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안철수진영은 경제정책 보다는 어떤 정치 개혁을 원하는지부터 얘기하는게 나을 것 같다.

러나 그런 정책으로 어떻게 국민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인지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민주당은 물론 새누리당과도 차별화가 안된다. 또 아무러나 국회는 앞으로 4년간 새누리당이 지배한다. 경제민주화 방안을 준비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새누리당이 하지 않겠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새누리당은 선거가 끝나고 나면 이 중 그 어느 것도 법으로 통과시킬 생각이 없어 보인다.

결국 무엇이 되었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양 진영이 동의할 수 있는 새로운 정책의 틀이다. 정치적으로는 경제민주화라는 용어를 공유하지만 양 당은 아직 속내 생각이 다르다. 가장 큰 간극을 보일 것은 시장과 국가의 역할에 대한 시각이다. 야당은 개방과 시장을 불신한다. 노무현이 시작한 FTA를 부정한다. 여당은 경제문야에서 국가와 규제를 불신한다. 재벌개혁에 소극적이고, 작은 정부를 주장한다. 적대적 공생관계이긴 하지만 정책분야에서는 학과 조개 처럼 서로 물고 버티고 있어 해결이 안난다.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낮은 출산율과 소득 불평등이다. 성장률이 지금보다 1~2% 더 올라본들, 젊은이들이 결혼을 꺼리고 아이를 못 낳으면,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희망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근래에 들어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으로 대두된 것도 대다수의 국민들이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경제학 교과서에 없다느니 모호하다느니 하는 식의 불평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의 연막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국민들이 이미 알고 있다.

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이 지금과 같은 덫에 빠지게 된 것은 서둘러 도입한 일본식 성장 위주 체제에 어설픈 미국식 경제 자유화가 겹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다 남의 것을 급하게 모방한 것이니 원형과 다르게 운영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성장전략을 수입했다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 성장률에 집착하는 경제정책을 운영했다. 일제의 잔재로 고등교육 수준이 낮아 자체 기술 개발을 기다릴 수 없으니, 핵심부품을 수입해서 조립가공하는 산업 위주로 성장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양국 경제의 대외개방도 차이다. 한국 경제의 대외개방도, 즉 수출과 수입의 합친 비중은 GDP의 110%를 넘는다. 이에 비해 일본은 30% 밖에 안된다.

한국은 높은 대외 개방도 때문에 세계화의 충격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는 사회안전망을 준비하는 과제를 일본보다도 더 등한시해왔다. 일본의 저부담 저혜택 복지 체제를 수입했지만 그것도 너무 늦게 했다. 10인 이상 직장을 상대로 국민연금제도가 도입된 것은 1988년, 도시 자영업자를 포함한 것은 1999년, 기업연금제도는 2000년대 중반에야 시작되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기업연금제도인 후생연금이 1941년에 먼저 도입되었고, 자영업자까지 포함하는 국민연금은 1958년에 도입되었다. 국민연금은 30년, 기업연금은 60여년이 늦었다.
  
한국 경제체제의 핵심 모순은 경제 개방도는 매우 높으면서도 사회안전망은 취약한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희귀한 경우에 속한다. 아래에 복사해온 그림은 최윤재가 시사인에서 쓴 글에서 가져온 것인데, 한국의 경우가 얼마나 다른 나라와 대비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그림의 원저자인 로드릭은 며칠 전 열렸던 세계지식포럼에도 참가했었다. 가 그 포럼에서
"통상 글로벌화가 잘된 나라일수록 국민들의 사회복지 혜택 수준이 높다." ... "한국형 경제개발 모델이 큰 성과를 거둔 만큼 이제는 사회복지 부문에도 관심을 기울일 때"... 그는 "사회복지 부문이 경제발전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게 현재 한국의 현실"이라며 "사회안전망을 비롯한 복지부문 지출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즉 대외경제 개방도가 높은 나라일 수록 사회안전망에 대한 사회욕구가 커진다는 것을 OECD국가간 비교연구로 지적한 그의 주장은 경제학계에선 유명하다. (세계화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로드릭의 책을 추천한다.)






한국민의 삶이 그만큼 “고단하고, 억울하고, 불안”한 이유는 세계화에 따른 경쟁과 구조조정의 위험에 극도로 노출되어 있는 나라인데도 정부가 그 위험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계화 시대의 자본주의 경제는 조세체제, 공정경쟁, 사회안전망 등으로 보호해주지 못하면 소득불평등 확대와 고용불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도 한국은 성장률만 바라보느라 이 모두를 소홀히 해왔다.

새로운 시각과 정치 리더쉽이 필요하다. 한국의 출산률 저하와 소득 불평등은 기존 한국사회 정치 진영의 좁은 시각과 무관하지 않다. 우파는 시장에 너무 경도되어 있고, 좌파는 너무 국가에 경도되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시장과 국가를 대체 관계로 보지 말고 보완 관계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한국과 같이 극도로 개방된 경제에 작은 정부와 감세를 추구하는 여당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미 세계화가 돌이킬 수 없게 진전된 한국에서 시장 경쟁을 반대하면서 규제와 복지 확대만을 추구하는 야당 역시 맹목적이다.

앞으로 우리는 개방경제를 계속 추구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안전망을 비롯한 복지부문의 지출을 늘릴 필요가 있다. 흔히들 성장동력을 얘기하면서 앞으로 한국 경제가 먹고 살 것을 찾아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는 구시대적 생각이다. 과거 국가가 주도하던 특정 산업 진흥정책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개방경제, 공정경쟁, 인적자본 투자, 사회안전망을 통한 혁신과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정부를 외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부의 역할을 늘려야 한다. 장기 불황의 우려가 늘고 있는 요즈음 사회안전망 확대는 세계화 대책으로서만이 아니라 내수경기 대책으로도 적절하다.

당분간 세계 경기 침체와 가계 부채 부담 및 부동산 시장 침체로 국내 경기 침체가 불가피하다. 경기 진작을 위해 부실을 덮는 미봉책을 쓰려는 유혹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기 침체를 핑계로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해는 공유화하려는 압력 역시 증가할 것이다. 자기 분야만 경쟁으로부터 보호 받아야 한다고 우기는 이익집단의 목소리도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거시적 경제 침체를 특정 부문 보호나 경쟁 제한으로 대처하려는 것은 근시안적이다.

관료와 보수언론이 신성시하는 균형재정 집착증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지금과 같은 불황에 균형재정을 고집하는 것은 중환자에게 요가를 권하는 꼴이다. 한국의 재정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므로 적극적인 재정정책이 필요하다. 세금감면 축소와 부가세 증세를 포함한 보편적 증세와 사회복지지출 확대 정책을 병행 추구해야 한다.

보편적 증세를 계획해야 한다. 야당은 이명박 정부가 실시한 감세 정책을 취소하자고 한다.그래보았자 늘어나는 세수는 제한적이다. 우선 GDP의 4% 정도 적자 재정계획을 세워야 한다. GDP 1% 당 12조원이니 연 48조의 총수요 증가가 생긴다. 동시에 과거 21%(2007)에서 현재 19% 대까지 내려온 조세부담율을 차기 정권 기간 중 점차적으로 최소한 23%까지 인상해야 할 것이다.

증세 속도와 별도로 당분간 적극적 재정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2012년 말 국가부채는 445조원, GDP 대비 34%로 OECD 국가 평균 103%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다. 게다가 한국은 자산, 융자금 등 자체상환 재원이 있는 금융성 채무는 전체의 50.8%(213.6조원)이며, 적자성  채무는 49.2%(206.9조원)에 불과하다. 타국의 경우 국가부채가 대부분이 적자성 채무다. 재정정책으로 소득을 증가시켜 GDP 대비 부채비율 감소시키려는 정책이 필요하다.    

경기부양정책의 수단도 바꾸어야 한다. 종래의 부동산 경기 부양, 특정 산업 지원, 대형 토목사업에 의한 경기부양 대신 인적자본 투자와 저소득층에 대한 직접적 혜택을 확대해야 한다. 이것도 지금과 같은 현금에 의한 소득 이전 보다는 현물 서비스를 국가가 직접 제공하는 쪽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를 위한 투자 역시 시작해야 한다.

한국의 의료와 교육체계의 가장 큰 구조적 문제는 지나치게 민간무분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처럼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약 80%를 사립학교에 의존하는 교육체제와 자영업자인 의사에게 의존하는 의료체제로는 교육과 의료가 사회안전망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 또, 복지확대 정책을 쓰려고 해도 중간에 남용될 위험이 크다. 보육, 학교교육, 의료, 고령자 복지 등 사회서비스에서 공공부문의 역할을 확대하고 무료나 소액의 자기부담으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전환하기 시작해야 한다.

사회보험 역시 확대하되 소득비례 정도를 높여야 한다. 현재는 예상 국민연금 수급액 평균이 80여만원에 불과하다. 지금처럼 보험률 적용 소득 상한을 월 3백 89만원으로 해서는 늙어서 받은 연금액이 푼돈에 그치게 될 수 밖에 없다. 연 400만원의 소득공제로 민간 연금저축을 장려한다지만 이는 공연히 금융업자들과 금융회사 직원들 배만 불려주는 꼴이다. 은행적금보다도 낮은 수익률을 주는데도 사람들이 수십조의 자금을 적립한 것은 이 소득공제 효과를 이용하기 위한 것이니 크게 보면 국고만 축내는 짓이다. 차라리 국민연금을 더내고 더 받게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실업보험 역시 확대해야 한다. 대상자, 기간, 실업보험급여 등을 모두 확대하고 그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기는 적자는 국가가 우선 재정으로 보전하고 점차 실업보험률을 올려야 한다.  지금처럼 하루 4만원을 상한으로 서너달 지급하는 실업보험은 유명무실하다.

이와 동시에 부실은 부실이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억지 보증과 정책대출로 좀비를 키우지 말아야 한다. 사양 산업이나 부실기업은 구제하기보다 정리 퇴출을 해야 한다. 경쟁력을 잃었는데도 외국인 노동자나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으로 연명하는 회사들은 그만 정리해야 한다. 그로 인해 남는 노동력은 생산성이 높은 산업과 성장기업으로 이동한다는 원칙을 확립하자. 그렇지 않으면 모든 계층이 확대된 국가의 역할을 자기 이해를 보호하는데 써먹기 위해 아귀다툼이 일어난다.

작은 정부를 부르짖는 보수의 시대착오와 시장과 경쟁을 불신하는 야당의 맹목을 모두 극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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