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일 금요일

세금 논의가 실종된 정치권과 언론을 보면서

항상 이상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 정치에는 세금에 관한 논쟁이 없다. 세금이 선거에서 관심사였던 유일한 경우는 5년전 대통령 선거 때였다. 한국 정치에서 세금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을 보고 나는 이것이 한국 민주정치 발전과정에서 하나의 큰 전환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를 보니 그것은 나만의 착각인 것 같다.

사실 그때 선거도 조금은 정상이 아니었다. 이명박이 뜬금 없이 감세를 들고 나왔지만 그것 때문에 이명박을 뽑은 사람은 별로 없다. 이에 비해 징수 금액으로는 훨씬 규모가 적은 종부세 폐지는 도리어 더 관심을 받았다. 종부세 때문에 부동산 값이 내려갈까봐 속으로 걱정하는 계층의 이해를 반영한 현상이었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의 감세에 반기를 들고 추가적 감세를 막은 것 역시 한나라당이었다. 이제는 새누리당에서 개인소득세율 최고 구간을 3억원 이상에서 2억원 이상으로 낮추자고 한단다. 이렇게 정당이 3년 만에 세금정책 방향을 바꾸는 것은 한국 특유의 현상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본 적이 없다. 그만큼 세금 관련 정책이 정치 진영을 가르는데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반영한다. 국민이 그만큼 자기 삶과 세금 사이의 관계에 대해 둔감하다는 말도 된다.

이번 선거 역시 과거 전철을 밟고 있다. 선거일이 50일 후로 다가왔는데도 세금 정책에 관한 논의는 실종상태다. 대신 모두들 복지 증대를 외친다. 국민이 국가와 갖는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세금이다. 정치나 선거에서 후보자들이 자기를 상대방과 차별화할 수 있는 것도 세금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번 선거에서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세금에 관해서는 모두들 딴 청을 피우고 있는 것은 거의 미스터리 수준이다. 솔직히 국민들이 세 후보 사이에 복지 정책 공약이 어떻게 다른지 관심이 있어보이지도 않는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복지 증대를 주장하는 것이 대통령 후보 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겨레나 경향신문 같은 진보계열 신문은 물론이고, 보수적 신문들도 이제는 한국 사회에 복지 지출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어제 조선일보 사설을 보자.

올해 한국의 복지 예산은 GDP의 9.5%로 OECD 평균(19.5%)의 절반 수준이다.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가 된 복지 욕구를 충족하려면 복지 예산을 계속 늘려야 한다. 그러나 전 국민에게 소득과 관계없이 일정 한도의 복지 혜택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급한 건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배려다.
사실 이 사설의 의도는 그냥 복지 증대를 주장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보편적 복지 이전에 급한 사람들에 대한 정책 부터 내놓으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은근히 박근혜의 복지정책을 지지한다.

대선 후보들은 자신들의 보편 복지 공약을 완성하기까지 이행 기간 동안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이런 불쌍한 사람들을 어떻게 그 고통에서 구해줄 것인지 청사진을 내놔야 한다. 국민도 복지 상품들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화려한 복지 진열장 차리는 데만 정신이 팔린 후보와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게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해줄 치밀한 복지 청사진을 내놓는 후보가 누군지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계산에도 불구하고 복지 증대 자체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목소리는 요새 와서 듣기 힘들다.

정작 더 흥미로운 것은 세금에 대해 말이 없는 것이 정치인만이 아니라 언론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보수 언론이 증세에 대해 떨떠름한 것이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증세 자체에 대해 반대한다기 보다는 이명박의 감세 정책에 대해 찬동했던 과거 전력이 있어서 이제 와서 말을 바꾸기가 거북할 것이다. 그저 정치인들이 복지만 외치고 증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는 비판 정도다.

한겨레신문도 증세가 필요하다는 외부 필자의 컬럼은 실으면서도 막상 자기들 사설을 통해 증세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증세 방안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는 정도의 어벙벙한 사설 정도다. 경향신문도 마찬가지다. 허구헌날 복지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진보 진영 언론이 막상 증세방안에 대해서 딴청을 피우는 것은 약간 희극적이다.

평소 한국의 언론은 의견 과잉이다. 객관적인 보도 보다는 자신들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일방적 기사를 쓰는 데 익숙하다. 그런 한국의 언론이 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 의견이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 진영 논리 상 자기들이 증세안을 구체적으로 들고 나와서 자기 진영 후보를 압박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아니면 자기들도 잘 모르기 때문인가? 정치인과 유명 지식인의 말을 나르는 것으로 지면을 채우다 보니 막상 자신들도 생각을 안해보았나? 하긴 과거 노무현 정부 때도 부동산 값 오른다고 노무현 정부의 무능을 비난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정책안을 내놓은 언론은 없었다.

이렇게 정치권이나 언론 모두 정작 제일 중요한 세금 문제에 대해 꿀먹은 벙어리 시늉을 하는 것을 보면 온갖가지 서구의 개념을 수입해서 정치와 경제를 개혁하자는 지식인들의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 실감하게 된다. 서양 옷을 입고 다닌다고 해서 우리가 서양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헌법과 민주주의를 수입해와서 겉을 싸발랐지만 한국 사회의 내면은 여전히 전통사회의 논리가 지배한다. 그 전통사회에서 세금이란 나랏님이 일방적으로 정해서 징수하는 것이었다. 그 나랏님을 선거로 뽑는 정도가 한국의 민주주의가 지금까지 이룬 성과다.

정책 선거? 아직 한국에서는 먼 얘기다.

댓글 3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