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일 금요일
정책금융과 재정
지난 8월 27일 금융위원회는 <정책금융 역할 재정립 방안>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첫째, 산업은행의 민영화를 철회하면서 산업은행과 정책금융공사를 다시 통합하고, 둘째, 수출입은행과 무역보험공사는 현 체제를 유지하며, 셋째, 기업은행, 신용보증기금 및 기술보증기금은 현재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정부가 경제정책 수립 시 얼마나 현상 유지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2007년 9월 당시 재정경제부는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과 일반은행의 업무 영역이 혼재되어 국책은행이 시장 마찰을 일으킨다는 지적을 수용하여 <국책은행 역할 재정립 방안>을 제시했었다. 그 주요 내용은 산업은행의 상업성 IB기능을 점차로 금융투자회사로 이관하겠다는 것이었다. 2009년 4월 이명박 정부는 구 산업은행을 분리해서, 중소기업 지원 등의 정책금융 업무는 신설된 정책금융공사로 하여금 전담케 하고, 나머지 기업금융·투자은행 업무는 현재의 산업은행이 맡아 운영하면서 장차 민영화하는 방안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처음부터 그 실현성이 의심스러웠다. 산업은행 민영화는 산업은행의 기존 역할, 특히 부실기업을 카펫 아래에 쓸어 담는 역할을 폐지 하겠다고 결정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 기능은 존속시켰다. 세계 경제의 위기 속에 국내적으로는 건설업·조선업·해운업이 부실화되었고, 그 중 금호그룹·STX그룹 등 대형 부실기업의 처리 과정에 정부는 산업은행을 사용했다. 산업은행은 여전히 ‘관치의 늘어진 팔’이었던 것이다. 애초부터 산업은행이 과연 정부보증에 의존하지 않는 민영기관으로서 경쟁력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웠고, 그 은행을 사갈 주체가 나타날 전망도 안 보였는데, 게다가 여기에 계속 부실기업을 쓸어 담고 있으니 그런 은행을 누가 사가겠는가? 또 법에 규정된 정책금융 업무를 맡아야 할 정책금융공사는 이를 수행할 능력을 갖추지 못해 처음부터 그 정체성이 모호했고, 끝내 자신의 존립 근거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발표된 방안은 2007년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국회와 언론에서는 5년 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추진한 산업은행 민영화가 원점으로 돌아갔고 그동안 산은지주사 설립과 산은 예수기반 확대 과정에서 벌어진 헛발질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경제개발 초기에 산업정책의 수단으로 시작된 한국의 정책금융 체계가 더 이상 그러할 필요가 사라진 지금에 와서도 그대로 온존되고 있고, 정부 당국이 이를 경기조절을 위한 거시정책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으로 중앙은행이 맡기로 되어 있는 통화신용정책의 역할을 행정부가 대신하여 경기조절을 하던 습관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려스러운 정책금융 범주 확대
한편, 이번 정부 발표에서 많은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정부가 정책금융의 목적으로 시장실패 보완이나 시장 선도 기능에 덧붙여 시장 안정을 범주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정부에 의하면, 시장실패 보완은 중소기업 지원 및 SOC 투자에 관한 것이고, 시장 안정은 긴급 유동성 지원 및 구조조정 등이 해당되며, 시장 선도 기능은 해외프로젝트와 신성장 산업 지원 등이 해당된다. 시장실패와 시장 선도를 보정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하겠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해도, 유동성 지원과 기업구조조정을 하는 시장 안정까지 정책금융의 범주에 슬며시 끼워 넣은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정부의 금융시장과 산업에 대한 개입이 이미 과도한 한국이지만 지금까지는 정책금융의 범주에 시장 안정을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2004년 카드 사태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긴박성을 이유로 정부가 금융시장에 개입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수한 상황에서 긴급대책으로 나온 것이지 정책적으로 아예 그 일을 자기의 주 업무로 하고 이를 위해 국가재정 주머니를 따로 차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번 정부 발표를 보면서 관치금융이라는 비판을 부담스러워하던 정부가 이번 기회에 이를 정책금융의 하나로 포함시켜 비판의 예봉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정책금융(Directed Finance)이란 정부가 특정한 부문에 자금 지원을 결정해서 금융자원의 배분에 개입하는 것을 뜻한다. 시장경제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는 나라에서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고 시장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정부가 금융자원 배분에 나서는 것인데, 시장기구에 의한 자원배분에 비해 과연 효율성이 있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이러한 정책금융의 비효율성을 비교적 효과적으로 극복한 사례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 정책금융의 폐해가 IMF 위기를 가져왔고, 그 후 지금까지도 중소기업을 포함한 제대로 된 구조조정을 저해하고 있으며, 한국 금융산업이 발전을 위해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IMF 위기 전까지 한국 경제에서 정책금융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가를 상기해보자. 여러 학자들의 추정에 의하면 금융자율화에도 불구하고 1992년 말 예금은행 대출에서 정책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56~58%였다고 한다. 이러한 대규모 정책금융은 결국 상업은행의 대규모 부실화를 가져왔고, 결국은 IMF 위기를 초래했다. IMF 위기 후 15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을 포함하지 않은 정책금융 지원액은 2012년 말 현재 117.4조원으로서 예금은행 및 정책금융기관 원화대출액의 10.1%에 달해 과거에 비해서는 많이 줄었다.(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을 포함하면 각각 306.2조원, 26.2%).1)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크게 늘어난 대출보증 및 보험액을 포함하면 예금은행과 정책금융기관의 원화대출금 중 33.1%가 정책금융의 지원을 받았고, 게다가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의 대출금까지 합하면 49.2%에 달해, 아직까지도 정책금융의 비중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책금융 폐해 직시해야
금융시장에서 정책금융의 비중이 크다는 것은 여러 문제를 야기한다. 금융산업과 시장에 끼치는 영향 측면에서만 보자. 정부가 내세우는 금융정책의 두 가지 목적이 금융시장 안정과 금융산업 발전인데,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다는 정책금융은 바로 금융산업 발전을 막는 모순을 초래한다. 첫째, 정책금융이 비대해지면 상업금융이 설 자리가 줄어들고 발전하지 못하게 된다. 둘째, 정책금융기관은 정부 보증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때문에 시장의 자원배분 기능을 저해한다.
자금을 시장에서 조달하고 있으므로 당장 재정에 주는 부담은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금 조달은 정부 보증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결국 정부가 잠재적 부채를 떠 안는 것이다. 특히 보증을 통한 정책금융이 지금처럼 지나치게 늘면 차입자와 민간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유발하여 우발채무를 증가시킬 수 있다. 또, 위에서 말한 좁은 의미의 정책금융만이 재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경우 경제규모에 비해 일반정부 채무 부담이 작게 나타나지만 일반정부 채무대비 공기업 채무비율이 높다. 한국은행의 통화안정증권 발행액을 제외할 경우 일반정부 채무 대비 공기업 채무비율은 80.7%(378조원)에 달하는데 이는 호주(62.9%), 일본(43.0%)보다 높다.2) 보금자리 사업, 4대강 사업, 학자금 대출 등 정책추진사업에 공기업의 부채가 동원되고 있고, 에너지 관련 시설 투자, 서민생활 안정을 위한 공공요금 인상 억제에도 동원되었다. 심지어 근래에 들어서는 저소득층 소득 지원에 정책금융과 공기업 부채가 동원되고 있는데 이것은 새로운 현상으로 더욱 우려스럽다. 정책금융은 한국경제의 발전 단계에 비추어 보아 이미 그 시효를 다한 지 오래 되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경기조절을 전통적인 재정정책과 통화신용정책에 의거하지 않고 과거와 같이 정부 개입에 의한 신용정책, 부동산 부양정책, 환율정책으로 운영하던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물론 재정정책의 실종이다. 경제성장률이 3%에 못 미치고, 실업자가 아무리 양산되어도 한편으로는 균형재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경기 조절과 구조조정을 정부 의도대로 하기 위해 정책금융을 통한 신용정책의 칼자루를 놓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게다가 공기업의 부채를 통해 소득 보전과 신용 확대도 추구하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경제정책 운영의 틀을 그만 버릴 때가 되었다.
(윗 글은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재정포럼 10월호에 권두컬럼으로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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