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한국정치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비판한다. 그러나 제왕적 또는 지나치게 집중화된 권력은 국가 만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 널려 있다.
어느 조직이든 권력의 핵심은 예산권과 인사권이다. 둘 중 인사권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집중화된 권력이란 인사권이 한두사람에게 집중되었다는 뜻이 된다. 권력의 전횡도 결국은 인사권의 전횡이다.
나는 보다 자율적이고 분권화된 조직 운영을 꿈꿔왔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별러왔던 것을 한화투자증권에 있는 동안 실행에 옮겼다.
인사권한을 부사장 및 다른 임원들과 나누었다. 임원 승진과 해임 결정을 부사장과 임원들이 토론을 거쳐 결정하게 했고 나는 최대한 뒤로 물러서 있다가 최종 숫자 결정, 즉 몇명을 승진 시키고 몇명을 해임할지에만 참여했다.
모두들 처음에는 어리둥절 했고,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러나 나와 같이 물러난 동료 임원들은 돌이켜볼 때 가장 좋았고 내 퇴임으로 계속되지 못해 가장 아쉬운 제도로 이것을 꼽았다.
나는 한국인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권력 사용 방식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다. 아무러나 기존 황제경영방식에 매몰된 재벌회사 문화에서는 내가 떠나면 없어질 제도였지만, 세상에는 얼마든지 훌륭한 다른 방식도 있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실증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이틀 전, 그 방식으로 3년 내내 동료 임원들과 부하 직원들 사이에 가장 높은 지지도를 받았던 사람이 이번에 물러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악화는 양화를 몰아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아래는 1년 전 자율적 인사 결정을 어떻게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글이다.
한화투자증권에 와서 일하면서 강조했던 것이 자율과 규율 사이의 균형이었다. 직원들에게 자율 권한을 더 많이 주는 대신 보다 더 엄격한 규율을 요구하겠다고 했다.
이런 자율권 확대 중에서 아마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던 것은 임원 승진, 평가, 퇴임을 임원들끼리 모여 토론을 거친 후 공개 투표로 결정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흔히들 상급자의 권력으로서 가장 놓기 싫어하는 것이 인사권이다. 나는 취임 했을 때부터 그것을 대폭 위양하기로 했다.
정기 임원 인사 철에 되면 우리 회사 임원들은 날을 잡아 회사 밖에 모인다. 제일 처음 순서는 신임 임원 선정이다. 사업본부장인 부사장들이 올해에 임원으로 승진시킬 후보를 제안한다. 주의 동료들의 익명 평가와 부서 직원들의 상향 평가도 같이 공유한다. 그러면 그 후보를 오랫동안 보아왔던 여러 임원들이 의견을 제시하면서 토론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 나는 최대한 개입하지 않는다.
이렇게 후보자들에 대한 소개와 토론을 모두 거친 후 신규 임원 승진 우선 순위를 적어내게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각자의 투표 내용과 그 우선 순위 합산 결과를 화면에 공개한다. 그렇게 하면 누가 누구를 우선적으로 뽑았는지를 서로 알 수 있다. 후보자가 소속된 본부 임원들이 자기 소속 후보자에게 투표한 것을 제외한 결과도 알 수 있다. 최종 결과와 가장 근접하게 투표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고, 가장 다르게 투표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다.
이것이 끝나면 상무보들은 퇴장한다. 상무보에 대한 평가를 상무와 전무, 부사장들만 남아서 하기 위해서다. 각 사업본부장들이 상무보에 대한 일차 평가 의견을 제시하고 나머지 임원들이 그에 대해 논의한다. 그 토론이 끝나면 상무들이 퇴장한다. 그러면 남은 고위임원들이 상무들에 대한 평가를 같이 논의한다.
최종 임원 고과는 나와 부사장들만 모인 자리에서 부사장들이 논의를 해서 결정한다. 각자가 임원들에 대한 고과 순위를 적어낸다. 이 순위를 합산해서 올려놓고 최종 순위를 결정하기 위한 이견 조정을 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과정에서 자기 의견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임원 승진 후보 우선 순위를 결정할 때 아예 나는 투표를 하지 않는다. 최종 임원 고과 순위를 위한 일차 투표 결과가 나올 때까지도 나는 내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의견을 말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부사장들 사이의 이견을 조정 할 때만이다. 그렇게 해야 부사장들과 임원들이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다.
퇴임 임원 선정도 투표로 한다. 대신 이것은 비밀투표로 한다. 각 임원들은 나에게 퇴임 후보 세명을 순위를 정해 적어낸다. 그러면 내가 그 투표 결과를 모아서 정리한 후 누가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는 알리지 않고 최종 결과만을 부사장들과 공유한다. 부사장들은 자기들이 선정한 퇴임 후보와 다른 임원들이 선정한 퇴임 후보를 비교해서 최종 퇴임 후보 순위를 정한다.
내가 하는 일은 그 중에서 몇명을 승진시키고 퇴임시킬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첫해인 2013년부터 이렇게 했으니 올해에는 세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