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7일 월요일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선거 하루 전

선거를 하루 앞 둔 오늘이다. 내일 저녁이면 향후 5년간 한국을 이끌어갈 당선자가 결정되고, 한국 사회의 화두는 그가 제시하는 어젠다에 의해 끌려갈 것이다. 그 당선자가 결정되기 전에 나름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

12월 들어 블로그에 글을 쓰지 못했다.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제기되는 이슈들이 너무 많다보니 도리어 그중 무엇을 골라 글을 쓸지 혼란스러웠다. <전환시대> 블로그에서는 되도록 경제와 금융에 관한 얘기만을 하려고 하지만 선거의 열기가 뜨거워진 마당에 객관적 정책 비평만 하는 것은 좀 한가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양 후보가 내놓은 정책안에는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정책도 많다. 누가 당선이 되든간에 공약 중 적어도 반은 아예 실행으로 옮길 꿈도 안 꾸었으면 한다. 또, 지금까지 한국 선거의 경험 상 두 후보 모두 당선 후 이들 공약을 실천에 옮길 것 같지도 않다. 이런 마당에 각 후보의 경제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선거 철이다. 선거란 후보 중 한 사람을 뽑는 것이다. 정책 분석을 아무리 해보았자 결국은 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곤혹스러웠다. 특별히 매력을 느끼는 후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없으면서 혼자만 거룩한 안철수, 아무리 봐도 정치적 리더쉽이 안보이는 무뚝남 문재인, 잔뜩 웅크린 독기만 보이는 박근혜.

하긴 언제는 매력적인 후보가 있었나 싶다. 지금까지 내가 매력을 느꼈던 후보는 한 명도 없었다; 87년 그 짧은 희망과 체념 사이에서도, 96년 귀국 후 처음으로 투표를 하면서도. 엘리트 의식 밖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이회창, 노태우에게 정권을 넘겨주고도 말 바꾸기를 식은 죽 먹듯 하는 김대중, 사회에 대한 불만과 자기 도취가 같이 섞여 불안한 노무현, 거론할 가치도 없는 정동영, 기탄없는 기회주의만 보이는 이명박. (그런데 이명박은 왜 대통령이 되려고 했을까? 누가 그에게 물어봤으면 한다.)

그래서 지금껏 나에게 대통령 선거는 후보 중 누구를 선택을 해야 하는 고민보다, 참가와 기권 사이에서 갈등이 더 힘든 5년 주기 이벤트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참가할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뽑은 후보가 당선이 안되어도 나름 뿌듯할 것 같다.

이번에 내가 기권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은 투표할 후보가 있기 때문이다. 음, 말하고보니 너무도 당연한 얘기다. 미안하다. 어쨋든, 국민들이 후보자를 알기 어렵게 하기 위해 만든 것 같은 지금의 선거법 체제 아래에서 내가 투표에 참가하기로 마음 먹게 된 것은 세번에 걸친 토론을 통해서다. 사실 나는 이 토론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처음 토론은 지루하고 답답해서 중간에 채널을 돌렸고, 둘째 토론은 저녁 약속이 있어 아예 못봤고, 세번째 토론은 아내가 한 후보 얼굴은 아예 보기도 싫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채널을 돌렸다. 그러나 토론 전문은 모두 읽었고 발췌한 비데오 영상도 찾아 보았다.

그 과정에서 마음이 점점 편해졌다. 선거에서 이슈가 되는 것은 결국 후보의 인격과 능력이다. 문재인의 능력은 모르겠지만 인격에는 안도감이 든다. 박근혜는 인격도 능력도 불안하다.

문재인은 토론을 거치면서 취약했던 자기 존재감을 나름 극복했다. 처음에는 무표정하고 과묵한 그의 스타일 때문에 자기 색깔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진지하고 성실한 그의 면모가 부각되었다. 노무현의 분신이라고 하지만 노무현의 분노의 정치, 분열의 정치를 할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대통령이 되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어려울지 알고 있다는 느낌이다. 노무현처럼 당선되고 우쭐거릴 사람이 아니다.


박근혜는 토론회를 거듭하면서 그의 무능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그저 토론 능력 부족으로 보였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지적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다. 15년간 국회에서 정치를 했다는 사람으로서는 놀라울 정도였다. 그에 비해 정치적 계산에 의해 준비해온 발언은 그 독기가 무서울 정도다. 난데 없이 전교조를 들고 나왔다. 박정희의 딸로서 표를 동원하는 능력에만 너무 의존해온 삶이 아니었나 싶다.


3년 전 우연한 기회에 문재인을 잠깐 만난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문재인이 정치 안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과묵한 사람이 어떻게 청와대에서 일을 했는지 신기했고, 그 생활이 힘들었겠다 싶었다. 나서기 싫어하고, 허튼 웃음 하나 없고, 지나칠 정도로 말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정치를 하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과거 한국 정치에 대한 나의 다른 예측처럼 이번에도 내 예측은 어긋났다. 문재인이 출마한 것이다. 그 예측이 틀려서 다행이다. 당선이 안되어도 좋다. 한국 사회에서 마음 놓이는 대선 후보 하나 만나기가 쉬웠나?

그런데 그의 정치적 지도력에 대해 의심을 하면서도, 그의 정책 중 상당부분을 반대하면서도, 그 정치인의 인격만을 보고 투표를 하러가는 나도 정상은 아니다.

내 마음, 그 동안 갈 곳을 잃었었지만 내일 하루만은 갈 곳을 찾았다. 고맙다, 문재인.

댓글 4개:

  1. 오늘 지난 대선 이야기를 읽으니 무척이나 재미있습니다.
    미국에서 나타난 버디 샌더스를 조금 이해하고 나니 문재인이 나타난 것도 어쩜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존과는 다른 정치인들이 때를 만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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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블로그 관리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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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누구의 선의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떼지 않는 저도, 문재인 대통령의 "대한민국, 그 안에 있는 국민들을 위한" 선의는 믿습니다. 인생이 그렇듯 그 선의의 결과가 100년 뒤 역사에 어떻게 남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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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누구신지 궁금하여, 찾아와보니, 역시!!
    좋으신분들이, 필요하신 분들이, 전문성을 갖추신분들이, 뜻을 펼치기위해 늘 문제의식을 갖고 준비되신 분들이, 자리를 잡아가서, 이나라가 내삶이, 우리의 다음세대가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더 좋은 환경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
    시작은 늘 힘드셔도... 좋은 미래위해 공공위해 자알 부탁드립니다. 그릇에 맞게 저는 제자리에서 응원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찾아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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