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4일 일요일

한국 메리토크라시의 위기 (II)

어제 산업은행 총재 인선에 관한 기사를 보고 생각난 김에 한국 사회의 가버넌스에 관해 평시 갖고 있던 생각을 썼다. 반응이 예상 외로 뜨겁다. 지금까지 페이스북에 올린 글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빠르게 응답을 했다. 그들도 평시에 느끼던 문제였던 것 같다. 
댓글에서 Hyungjin Hong씨가 오케스트라 지휘자 분야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러나 분야 별로 따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아예 각 분야의 사람들이 자기 분야에서 이와 관련해서 어떤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댓글을 달아보면 어떨까 싶을 정도다. 그렇게 하면 이게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를 실감할 수도 있을 것이니까. (꼭 그러라는 얘기는 아니다.) 
얼마나 이 문제가 한국 사회의 최상부 부터 그 아래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문제인지 한번 챙겨보자.
우선 대통령, 대법관, 국회의장, 국회의원 부터가 그렇다. 대통령은 단임이고,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임기는 6년이다. 대법원장은 연임할 수 없고 대법관은 연임할 수 있지만 연임한 적이 없다. 심지어 정년까지 있어 대법관은 65세, 대법원장은 70세다. 헌법재판소도 마찬가지다. 나는 왜 대법관 임기가 6년 밖에 안 되고 정년까지 있는지 모르겠다. 미국은 물론 일본, 독일, 스페인 등 많은 나라의 대법관은 임기가 없는 종신직이다. 그게 맞다.
대통령이 단임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낳는지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다. 3년차만 되어도 레임덕이어서 공무원들이 말을 안 듣는단다. 내 생각엔 어차피 연임이 안되니 국민을 겁내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공무원들은 단임 대통령제 아래에서는 급한 불만 끄는 시늉을 하면서 시간을 넘긴다. 일하는 척 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된다. 처음에 약속한대로 정책의 효과가 났는지 알아보기 전에 장관이 바뀌고 정권이 바뀐다. 장으로 부임해서 하는 일 중에서 부하 관료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인사 숨통을 열어주고 부서를 바꾸어 주는 것이다.
이게 정당으로 가면 더 짧아진다. 당 대표는 2년이지만 그것도 수시로 바뀐다.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는 1년이다. 사실 나는 이것이 제일 신기하다. 세상 어디를 가면 정당 대표 임기가 2년이고 의회 원내대표를 1년만 하는 의회가 있는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도 궁금하다. 
비례대표를 하면 당연히 한번에 그쳐야 하고 지역구로 나가야 한다. 원래 갖고 있던 지식에 비례대표로서의 경험을 더해 본격적으로 공무원 감시를 제대로 할 만 하면 나가야 한다. 자기들 끼리는 꽃보직으로 치는 자리이니 그것을 한 사람에게 계속 하라고 놔둘 리가 없다. 
지역구라고 해도 만만하지가 않다. 3선 쯤 하면 험지로 나가라고 후배들이 종주먹질을 한다. 자기들도 의원이 되고 싶으니 자리 좀 비켜달라는 것이다. 선거구민의 의견은 알 바가 아니다. 
민간부문으로 가보자. 공기업체 사장은 물론 재벌 회사 사장 중에서 지배주주 본인이거나 친인척이 아니면 3년을 채우고 나서 연임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들이 연임을 하고 싶어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특별히 잘하지 않은 이상 바꾼다가 대세다. 
그중에서도 관치가 제일 드센 금융산업을 보자. 은행장 중 연임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정부가 주주도 아닌 곳에서 연임 하려고 해도 관의 눈치를 본다. 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곳은 말할 것도 없다. 요새는 아무나 시킨다. 우리금융의 경우 금융업을 전혀 모르는 관료를 지주회사 회장을 시켰다. 회의 석상에서 금융산업 기초 용어를 못 알아들어서 참석자들이 조마조마 가슴을 졸이고 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정권이 바뀌자 일년만에 내보냈다. 온갖 자리의 하마평에 오르내려서 사람들이 지겨워서 어디 자리 하나 빨리 마련해주어야겠다고 푸념을 하던 대통령 대학 동창을 시켰다.
그런 곳에서는 연임하는 법이 없다. 잘나서 시킨 것이 아니라 힘 센 사람 덕에 되었는데 오래 있겠다는 것은 신사협정 위반으로 생각한다. 그가 과거에 어떤 성과를 냈기에 행장이나 회장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런 것을 물어보면 물색 없는 인간 취급을 당한다. 물러날 때 무슨 일을 했는지도 관심이 없다. 할 만큼 했으니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들 지금 사람은 누구 덕에 되었는지, 다음에는 누가 누구 덕에 될지에만 관심이 있다. 
재벌 금융 회사도 마찬가지다. 전혀 그 분야에 경험이 없는 사람을 사장으로 임명하는 일이 너무도 자주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로 몇년 전 삼성생명 사장으로 그룹 감사팀장 출신인 사람을 임명한 적이 있다. 생명보험은 커녕 금융회사에 다닌 적도 없는 사람을 시켜서 사람들이 혀를 찼다. 금융당국 마저 불쾌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사실 삼성은 그런 일을 자주 한다. 물론 그런 사람들 쳐놓고 오래 다니는 사람은 없다. 교보생명은 어떤가? 45세 중년이 되도록 산부인과 의사만 하던 아들이 와서 경영을 하고 있다. 지금은 거의 20년차에 달하니 나름 익숙해졌을 것이지만 처음 10년은 어땠을지 상상도 안 간다. 
전문성이 없는 내부 인사를 사장으로 시키는 것 보다 더 자주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잦은 사장 교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회사 직원들이 자주 내게 해준 말이 있다. 지난 10년간 내가 다섯번째 사장이라고 했다. 안다, 그 마음. 나라도 심드렁하겠다. 
그래서 처음 고용계약을 할 때 다른 것은 다 좋다, 보상 조건도 알아서 해라, 단 임기 보장은 확실하게 하라고 했다. 회사를 살리려면 그것 없이는 그 누가 와도 안된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그것을 못 참았다. 나는 당연히 거부했고, 그것이 도리어 화제거리가 되었다. 우리가 이토록 비뚤어진 사회인 것이다. 
생각을 해보자. 사장이 3년마다 꼬박꼬박 바뀌는 회사, 그 사장이 이사회의 독립적이고 심도 있는 논의와 주주총회의 의결을 통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 정해지는 회사가 제대로 굴러 갈 수가 있을까? 그런 사람이 혁신을 하고 변화를 이끌 수 있을까? 사장이 3년 후에는 물러난다는 것을 모든 조직원이 예상하는데 그들이 왜 지도자가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가겠는가? 사장이 갈릴 때마다 회사방침이 바뀌고 전임 사장과 가까웠던 사람들이나 그가 영입한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하는데 직원들이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이유가 있을까?
이것은 인간사에서 너무도 기초적인 것이라서 굳이 말하는 것이 구차할 정도다. 그런데 한국 금융산업에서는 이런 일이 도리어 일반적이다. 
한국 금융산업에서 혁신이 일어나지 않고, 변화를 하지 못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러나 잠깐만 하고 그만 둘 지도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혁신과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 임직원들도 그 사정을 그동안 경험으로 빤히 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을 하지 않을 뿐 같은 생각을 한다. 일단 상황이 이렇게 주어지고 나면 결과가 뻔하다. 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 
내가 찾아낸 유일한 탈출구는 그런 것에 눈을 감는 것이다. 마치 영원히 이 회사에 다니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변화를 추구하고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는 수 밖에 없다. 마치 우리 모두가 결국은 죽지만 영원히 살 것처럼 사랑하고 고뇌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음, 이거 너무 나갔다.) 
이게 한국 사회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예사로 발생한다. 하도 빈번하게 일어나서 이제는 얘기 거리도 안 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정부는 눈치도 안 본다. 기탄이 없다. 그냥 한다.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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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1. 대구빡들이 많으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도 벌어지는군요. 쉬운 논제는 아닙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님이 매우 긍정적이고 도전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점 높이 삽니다. 하긴 제가 평하기 매우 조심스럽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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