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9일 월요일

남한산성, 이제 그만 잊을 수는 없겠니?

페이스 북 담벼락에 남한산성에 관한 글들을 보면서 옛날부터 품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 사람이면 모두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벌어졌다는 주화론 대 주전론 싸움을 안다. 나는 이 얘기를 어릴 시절, 아마도 초등학교 4~5학년시절, 백마산성 임경업을 주인공으로 한 TV 드라마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최명길과 김상헌 역할을 누가 맡았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보면서도 저거 참 답이 없는 논쟁이겠다 싶었던 것은 기억한다. (드라마 시리즈 후반부에 왜 임경업이 뒤따라가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있었는지가 명확하지 않았던 것도 기억한다. 이건 지금도 잘 모른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집에 정음사 세계문학전집 50권 밖에는 워낙 읽을 것이 없던 탓도 있지만 당시 나는 아버지 서재에서 역사 학술서와 논문집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책에서 읽은 얘기를 갖고 마침 역사를 가르치던 담임 선생님에게 수업 후에 찾아가 물어서 그를 당황하게 만든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예를 들어 한사군이 산동 반도나 요동에 있었다는 식의 주장과 교과서가 배치되는데 왜 그런 것이냐는 등.
그때 병자호란 전후 역사를 조금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병자호란 시기에 주전론이 옳은지 아니면 주화론이 옳은지를 갖고 백날 얘기해봤자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당시 중요 사건의 연대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난 것이 1627년 3월 초다. 침입하자마자 열흘도 안돼 평양을 함락시켰다. 인조는 그 소식을 듣고 그 다음날(3월 12일) 강화도로 도망갔다. 전쟁 시작부터 딱 10일 걸렸다. 강화도를 건널 준비를 하지 않았던 후금군은 입맛을 다시면서 전쟁 두달만에 화평을 맺고 철군했다. 
후금이 청으로 이름을 바꾼 후 명나라를 치기 전에 배후를 정비하고자 조선을 침략한 것은 9년 후 1636년 12월 28일이다. 정묘호란의 경험을 살려 기병 위주로 구성한 청군은 정묘호란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압록강 도하 사실을 조정이 알게 된 것이 10일이나 지난 1월 7일이었는데 그때 청군은 이미 개성 근처에 도달했었다. 강화도로 도망갈 시간이 없었던 인조는 1월 9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청은 이번에는 수군도 끌고왔다. 강화도 침공 하루만인 1월 22일 함락시키고 봉림대군을 잡았다. 이 소식을 듣고 인조는 1월 30일 항복한다. 단 한달 사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그만큼 청은 준비를 하고 왔고 조선은 전혀 준비를 못했다. 
하지만 준비를 했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과연 조선이 준비를 제대로 했으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까? 
다음이 핵심이다. 청이 명을 멸망시킨 것이 1644년이다. 병자호란 뒤 겨우 8년만이다. 중학교 때 이것을 알고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 그만큼 청은 강대했다. 그렇게 융성한 청나라를 상대로 당시 조선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것은 불가능해보였다. 
그렇다면 그 당시 주전론, 또는 척화론은 정말 무망한 헛소리였다. 조선은 청을 상대로 전쟁을 해나갈 국력이 없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였다.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 자체가 조롱감이다. 그러나 주화론 역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소중화라고 생각하던 당시 조선의 지배계층으로서 주화론은 단지 전쟁이 벌어지고 나서 임시적인 변통으로나 내세울 수 있을 뿐,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는 어려운 주장이었다. 명나라가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청이 황제를 칭하면서 군신간 관계를 요구하면 명분을 중요시 하는 조선의 지배층으로서는 현실적으로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즉 이래저래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낙후되기 짝이 없는 조선 지배계층에게 이 소중화 사고방식이 얼마나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있다. 바로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박지원이 건륭제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떠난 사신단에 끼어 북경에 간 것은 1780년이니 병자호란 후 거의 150년이 지났을 때다. 그런데도 그 사신단은 불교에 심취한 건륭황제 자신이 예를 갖추는 티벳의 판첸 라마를 만나라고 굳이 자리를 마련해 주자 처음에는 거부했다. 만난 자리에서도 예를 갖추기를 거부했다. 판체라마가 선물로 불상을 주자 갖고 갈 생각은 커녕 버리다시피 하인들에게 주었다. 요새 말로 진상을 떨은 것이다. 이것은 사실 그들이 청 황제를 속으론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돌아와서 쓴 열하일기에서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연호를 쓰지 않고 건륭제 연호를 썼다고 박지원은 비난을 받았다. (이건 커서 알게 된 얘기다.)
다시 돌아와서, 중학생 시절 병자호란 8년 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켰다는 것을 알고 나는 조금 허전했다. 중학생인 내가 보기에도 조선은 이러나 저러나 당하게 되어 있었다. 주전론은 국제 정치상 불가능했다. 주화론도 국내 정치상 실행 불가능했다. 
성인이 되어 나는 북쪽 유목민족에 의한 대륙세력이든, 아니면 일본이나 미국 등 해양세력이든, 주위 세력이 강성해지면 한반도는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주전론과 주화론을 갖고 지금까지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것은 정말 쓸데 없는 얘기다.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찻잔 속 태풍이다. 내가 보기에 그 얘기가 그후에도 오랫동안 두고두고 입에 오르게 된 것은 오로지 당시 조선 지배계층의 우물안 개구리 식 낙후된 사고방식 때문 탓이다. 그들은 자기 주제를 알지 못하고 이불 안에서 활개짓을 너무 오래 했다. 그것 대신 병자호란 이후, 아니 명나라 멸망 이후 중국 문물을 적극 받아들였더라면 조선은 조선 후기 사회 처럼 나락에 빠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1636년부터 1876년까지 자그마치 240년을 날려버렸다.
하지만 이미 이 일화는 한국인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나는 이것이 아쉽다. 하등 중요하지도 않은 사건을 갖고 왜 두고두고 울궈먹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것이 그후 조선 왕조 내내 회자되고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역사적 기억에 깊이 박히게 된 것은 그후 벌어진 당파싸움에 이것이 이용된 탓인 것 같다. 김상헌이 귀양에서 돌아와 장수를 누리고 안동 김씨 대장 노릇을 하면서 이 사건을 울궈먹은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고루한 조선 사대부들이 이것을 갖고 두고두고 자기들끼리 피터지게 싸우고 정파를 갈랐는지 모르지만 이거 정말 쓸데 없는 얘기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사람 저사람 이 얘기를 반추하고 재해석해서 극적인 순간으로 내놓는다. 요새 같아서는 역사소설과 역사영화가 역사를 뒤흔드는 꼴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 극적인 것은 정묘호란을 겪고도 정신을 못 차린 조선의 지식인층이고, 정묘호란의 경험을 엉뚱하게 해석해서 농성작전을 짠 조선군이고, 병자호란 때 청의 압록강 도하를 거의 열흘이 지나서야 알 정도로 안보와 외교에 어두운 지배층이고, 수백명의 충청도 수군을 이끌고 와 기껏 도망가지 않고 싸웠지만 1만이 넘는 청 수군의 강화도 침략을 막지 못했다고 나중에 참수 후 효수당한 충청 수사 강진흔이다. 병자호란 갖고 영화나 소설을 만들 거면 이런 것을 갖고 만들면 좋겠다. 
막상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더 큰 교훈은 다른 데 있다. 냉엄한 국제정치에서 한국이 가질 수 있는 독자적인 공간이 거의 없다는 것, 자기들끼리 싸워봤자 아무 소용이 없고,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것, 바깥 세상 돌아가는 정세에 따라 그때 그때 편을 잘 골라야 한다는 것, 그러러면 적어도 우리끼리라도 똘똘 뭉쳐야 한다는 것, 상대방 정파가 싫어도 외교안보에 관해 야당은 정부 비판 시 언동이 신중해야 한다는 것, 동북아 국제정치에서 한국의 독자적인 군사력은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하다는 것, 그래도 군대는 독사처럼 날을 세우고 건드리면 상대에게도 피해를 줄 태세를 갖고 있어 보여야 한다는 것 등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말하고보니 북한이 그러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차원에서 보면 이런 분열이 따로 없다. 끙!)
그래서 나는 중학생때부터 앞으로 되도록이면 남한산성, 또는 주전론/주화론 얘기는 사람들이 그만 얘기하길 바랐다. 물론 그 희망은 전혀 실현되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그냥 지나갔으면 좋겠다. 잊자. 차라리 다른 걸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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