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국정감사 시 고압적인 국회의원들의 태도를 불편해 하고 비판한다. 그 누가 보아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이에 못지 않게 이상한 것이 있다. 바로 피감사인의 비굴에 가까운 태도다.
피감 기관의 기관장들은 마치 무엇을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쩔절맨다. 예를 들어 이은재씨의 경우에서도 그가 무작정 소리를 질러 대는데도 조희연씨는 반박은 커녕 항의 조차도 하지 않았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은재씨의 행동에도 조희연씨는 하다 못해 불쾌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국회의원을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피감사인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나는 작년 이 무렵 정무위의 국정감사에 나간 적이 있다. 마침 그날은 가족 내 경영권 쟁탈전 때문에 롯데그룹의 신동빈씨도 불려나온 자리였다. 나와 신동빈씨 모두, 민간 분쟁을 갖고 국회의원들이 행정부 감시를 위해 개최한 국정감사에 불려온 것이다. 내가 보기엔 둘 다 부적절한 소환이지만 자기들끼리는 과거부터 늘 하던 짓이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귀찮기는 했지만 구경거리 생긴 셈 치고 나갔다. 예상은 했지만 그 자리에서 본 국회의원들의 행동은 한심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오후 내내 신동빈씨를 갖고 마치 고양이가 쥐를 다루는 듯 쓸데 없는 소리를 해가면서 자기들끼리 노닥거렸다. 왜 가족내 분쟁을 갖고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 자리에서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 내 차례가 돌아오자 세번째 줄에 앉아 있는 나에게는 일어서라고 했다. 사람들을 너무 많이 불러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그런다고는 하지만 자기들은 앉아 있으면서 상대방은 세워놓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나를 부른 김을동씨는 장황하게 자기 할 말만 하고 말미에 시정할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공정거래위원장에게 조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럴 것이면 국정조사를 통하지 않고 그냥 정부에 얘기했어도 될 일이었다. 참고로 그와 그의 보좌진은 우리 회사에 와서 자초지종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국정 감사는 20명에 가까운 국회의원들이 차례를 돌아가면서 기관장과 증인으로 부른 사람들 중에서 자기가 묻고 싶은 사람을 고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미국 의회와 같이 특정 사안에 연관된 사람들만 불러서 집중적으로 물어보는 방식이 아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그 자리에 와 있던 많은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이 자기와 아무 상관도 없는 롯데 이야기를 할 때 자리를 뜰 권리도 없었다. 완전히 자기들 편의만을 생각한 진행이었다.
또 하나 이상한 일이 있었다. 국회의원들이 돌아가며 하는 질문을 세번째 할 차례가 되자 김기식씨가 나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나는 국정감사에 소환한 안건이 아닌 것에도 대답해야 하느냐고 위원장에게 물었다. 모두들 뜨악해 하는 분위기였다. 위원장은 물어보면 대답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 역시 부적절하다. 나는 지금도 행정부의 업무를 감사하는 자리에 부른 김에 자기들이 묻고 싶다고 아무 것이나 물어보는 그들이 관행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고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언행은 국회의원의 국정감사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감사원 직원들이 행정부 감사에 나갔을 때 보이는 행동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압적이다. 나는 노무현 정부 시절 우리금융지주에 근무할 때 그들이 감사 나와서 거드럭 거리는 행동을 직접 보았다. 군사독재 시절 보안대의 안하무인인 태도를 떠올리면 될 정도였다. 내가 사회에 나온 후 접한 인간 행동 중 가장 무례했다.
공무원들이 이런 감사원을 싫어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특히 전문성도 없는 사람들이 정책 감사를 하겠다고 나서서 설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심하다. 내 경우는 우리금융지주에 감사를 나온 감사원 직원들은 막상 금융지주회사 운영을 갖고 감사 보고서를 쓸 실력이 안되었다. 그들은 감사 종결을 앞두고 갑자기 우리를 불러 아예 감사 현안에 대한 자체 보고서를 써달라고 요구했다. 내가 보기엔 자기들이 써야 할 감사 보고서 초안을 대신 써달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기가 막혔지만 어쩌겠는가, 써 줄 수 밖에. 이런 사람들이 정책 감사를 한다고 하니 공무원들이 비웃고 싫어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감사인의 일방적이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은 민간에서도 일어난다. 재벌 기업에서 실시하는 감사도 이와 비슷하게 고압적인 경우가 많다. 대개 대기업의 경우 그룹 감사와 기업 내 감사가 있는데, 내가 겪어본 삼성의 그룹 감사팀의 태도는 어지간한 사람이면 그 자리에서 멱살 잡고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이는 삼성 그룹만의 나쁜 문화이고 다른 기업은 안 그럴 수도 있다. 삼성도 과거 같지는 않다고 들었다. 직원들의 권리 의식이 강해져서 외부로 문제가 불거져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국정감사를 볼 때 마다 도대체 한국사람들은 감사를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감사(audit)은 원래 어떤 조직이 외부에 공표한 재무적인 정보가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독립적인 곳에서 조사하는 것을 뜻한다. 감사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제 삼자가 독립적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재무적인 것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밖에 공표한 것과 같은지 확인하는 작업을 한다. 앞의 것을 재무 감사라고 하고 뒤의 것을 업무 감사라고 한다.
감사는 꼭 의심가는 행위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조직의 책임성을 제고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하는 것인 만큼 감사인과 피감사인은 동등한 입장이다. 대부분의 감사는 피감사인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감사는 보고한 것과 같은지를 알아보기 위한 작업에 불과하다. 특별히 어떤 문제가 생겨서 실시할 경우에도 그러하다.
그런데 한국에서 감사는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례 감사라고 하면 실시하는 사람이 위에서 내려보면서 마음껏 갑질을 해도 되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이는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적인 문화관습 탓이 제일 클 것이다. 또 일상적으로 워낙 가식이 많고 부정부패가 퍼져 있어서 모든 사람이 뭔가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전제를 모두들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인 점도 있다.
우리 사회가 익숙한 감사는 상대방이 윤리적이고 정당하게 일을 처리했을 것이라는 전제가 없이 시작하는 감사다. 감사를 하는 사람이 감사를 받는 사람에게 감사의 과정과 결론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지는 감사이기도 하다. 나는 너를 언제라도 해꼬지할 수 있지만 너는 나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일방적 권력관계 만이 설치는 감사다. 감사를 하는 사람은 누가 감사할 것인가, 감사인은 자기 행동에 관하여 누구에게 책임을 질 것인가(accountability)가 무시된 감사다.
이렇게 한국에서는 감사를 일방적 권력관계로만 이해한다. 감사 하는 사람은 무례해도 되고 피감사자는 무조건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는 문화 습관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한국에선 피감사인이 이 암묵적인 문화 규칙을 어기면 순식간에 거만하고 건방진 사람이 된다. 금방 조리 돌림감이 된다. 언론도 이 연극의 일부로 참가한다. 한편으로는 자기들 눈에도 지나친 감사인의 부적절한 태도를 비판할 때도 있지만 이에 항의하고 불쾌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비판 대상이 된다.
이것은 하나의 사회 연극이다. 국회의원들은 듣기 불편할 정도로 목소리에 날을 세워서 윽박지른다. 예, 아니오만 대답하라고 한다. 여기가 어느 자리인줄 아느냐고 눈을 부라린다. 그게 그들 역할이다. 그들 못지 않게 사회적 존경을 받는 고위 관료와 기관장들은 속으로는 화가 치밀지만 그들 앞에서는 쩔쩔매는 시늉을 한다. 어차피 하루 이틀만 지나면 그만이라는 것을 모두 안다. 속으로는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공손하기 짝이 없다. 국회의원들 앞에서 적당히 바보인 척 행동할 줄 아는 것을 한국 엘리트 사회에서는 일종의 출세 요령으로 받아들인다.
매년 국감에서 벌어지는 이 한국적인 풍경은 그들이 이 연극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니면 조희연씨의 소극적인 태도, 다른 기관장들의 쩔쩔매는 행동을 설명할 수 없다. 가끔씩 벌어지는 소동은 이 연극의 규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때문에 일어난다. 그 규칙에는 화장실에서 푸념을 해선 안된다는 것이 최근에 추가되었다.
한국 사회는 선진국에서 도입한 감사(audit)란 개념을 도입한지 70년이 지났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아직도 감사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거나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책임성(accountability)는 아직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번역 어휘 마저 찾지 못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형식에 그치는지를 잘 드러내는 예라고 하겠다.
(페이스 북 10.11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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