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7 페이스북 글 옮김)
오늘 새벽 일찍 잠에서 깬 김에 김기원 선생의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를 읽었다.
그 중 그가 한국사회에 문화혁명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대목이 있었다. 그 역시 근래에 들어 나와 비슷한 생각의 여정을 거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경제학자들은 모든 것을 경제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는 그것을 경제결정론이라고 부른다. 사실 그는 그러한 경제결정론만으로는 한국사회를 설명하고 변화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정치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그가 독일에 가 있으면서 독일을 이해하는데는 경제와 정치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뒤에 독일 사회의 문화적인 결을 이해해야 한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 사회 역시 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거치지 않고는 변혁을 하기가 어렵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가 가장 크게 느낀 문화적 차이는 독일의 사회적 신뢰와 독일인들의 직업적 긍지였다.
독일에 가서 책을 주문했더니 책을 우편으로 배송하고 청구서를 동봉했더란다. 의사에게 찾아가도 먼저 치료하고 나중에 청구서를 보낸다. 지하철에는 개찰구가 없다. 사회적 신뢰가 깊어야 가능한 얘기다. 그 덕분에 사회가 거래 비용에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가 이것을 중요하게 느낀 이유는 유럽에서 고부담 고혜택 복지제도가 가능한 것이 바로 이러한 사회적 신뢰 때문에 감시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제를 뒷받침한다는 중견기업중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는 기업 (히든 챔피언)을 찾아갔을 때 그가 본 것은 독일인들의 직업적 긍지였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밴드를 하던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오디오 기기를 만들고 싶어서 1977년 회사를 시작했고, 지금도 직원이 50명 밖에 안되는 기업이지만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오디오 회사란다. 직원들은 일년에 한달 휴가를 가지만 나이가 60대인 사장은 바빠서 휴가를 그 해에 한번도 못 갔단다. 김선생은 독일의 히든 챔피언이 바로 이런 독일인들의 직업적 긍지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그는 독일에 머물며 한국을 돌아 보면서 새삼스레 한국사회의 낮은 신뢰 수준과 직업적 긍지의 부족을 통감했던 것 같다.
세월호 사건에서 배에 탄 선객을 버리고 자기들만 도망쳐 나온 선장과 선원들을 보면서 그는 직업 윤리의 실종을 보았다. 기복신앙에 빠진 한국 교회와 부패한 목사를 보면서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문화'의 결여를 보았다. 김용준씨처럼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사람이 총리를 하겠다고 나서는 데서 직업적 긍지의 매장을 보았다. 회사 돈을 자기 돈처럼 주무르는 재벌총수, 그런 재벌로부터 돈을 넙죽넙죽 받아 챙기는 정계, 관계, 언론계, 학계, 검찰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공범자 유력집단'을 보았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직업윤리를 망각한 것은 유력층만이 아니다. 거대기업이나 공기업 정규직도 '특수이익 집단’이 되어 다른 노동자에 비해 부당하게 높은 처우를 누리면서도 부끄럼을 모르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내 입장에서 덧붙이자면 고객에게 뻔히 안 좋은 줄 알면서 보험을 팔아대는 보험 회사들이나 투기적 주식 매매를 부추키고 자기에게 이익이 더 떨어지는 상품을 권하는 증권회사들도 직업 윤리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원금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자만 갚는 대출을 남발하는 은행도 마찬가지다.)
사실 나는 그가 독일에 가기 전에 그와 이런 문제에 관해 여러번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한국 사회를 단지 경제나 정치만으로는 잘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엔 조선 사회 특유의 문화적 전통이 현재 한국 사회의 모순을 많이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개혁 가능성을 심각하게 제약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120년 전까지 한국 사회는 노비가 대규모로 있던 사회였다. 노비는 일본에는 없고, 중국에는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노비는 빚을 못 갚은 사람이 노비가 된 것이어서 노비 신분은 당대에 끝났다. 한국의 노비는 부모 중 한사람만 노비여도 자식까지 노비인 악질적인 제도였다.
조선은 양반과 상놈, 그리고 노비로 이루어졌던 신분 사회였다. 양반은 자기들끼리는 많지 않은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패를 나누어 싸웠지만 그들 모두는 군역과 세금에서 자유로운 특권층이었다. 상놈은 그런 특혜를 누리는 양반이 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노비의 억울한 사정은 그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각자도생인 사회인 것은 그냥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공립 교육은 버려두고 내 자식을 살리기 위해 사교육에 매달린다. 비정규직의 고통은 놔두고 정규직 감원 한다고 희망버스를 동원한다. 집이 없어 고시방에 옥탑방을 전전하는데 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부동산 값을 올리는데 열중한다. 빈곤에 시달려 자살하는 노인들을 두고도 국민연금을 쌓아두자고 한다.
사회적 신뢰와 직업적 긍지? 나만 노비가 아니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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